START-UP STORY2016.11.28 14:34

<사진 : 이케아(IKEA)>


가구 제국을 이룩한 스웨덴의 작은 소년



연간 40조를 넘는 매출액, 15만의 직원, 한해 매장 방문객 7억 명 이상. 세계적인 가구 브랜드로 손꼽히는 이케아(IKEA)가 세운 기록이다. 독특한 유통방식과 마케팅으로 가구 제국을 이룩한 이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잉그바르 캄프라드이다. 독일 이민 가정의 3세대였던 캄프라드는 5살 무렵 성냥을 팔아 돈을 버는 등 어렸을 때부터 장사에 재능을 보였다. 일곱 살이 되면서는 엽서와 가방 등 다양한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캄프라드는 훗날 용돈벌이로 시작한 장사에 점점 집착이 생겼다며 스스로에 대해 장사꾼의 기질을 타고 났다고 회고했다. 17살이 된 캄프라드는 집 앞 창고에 잡화점을 차리고 자기 이름의 앞 글자 ‘I, K’, 어린 시절을 보낸 농장과 마을 이름에서 ‘E, A’를 따 본격적인 창업에 나섰다. 이케아의 시작이었다.

 

창업 당시 시계나 장신구 등을 판매하던 이케아가 가구를 전문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5년이 지난 후였다. 1940~50년 대 스웨덴 정부가 주택 100만 채를 건설하겠다는 도시화 정책을 발표하자 캄프라드는 신축 건물이 늘어나면 가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도시에 몰려든 노동자들은 값싸고 실용적인 이케아 가구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에 캄프라드는 농부들이 주로 구독하는 주간지에 이케아 뉴스라는 브로슈어를 끼워 넣어 홍보에 나섰다.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고 알려진 이케아 카탈로그의 시초다. 캄프라드는 한 발 더 나아가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보고 구매할 수 있도록 상설 전시장을 열기도 했다.

 

그가 내세운 전략은 유통과 보관 시스템의 혁신을 통한 물류비 절감이었다. 그는 먼저 가구를 조립형으로 설계해 플랫 팩(flat pack)에 담는 방식을 취했다. 캄프라드가 이런 방식을 도입한 것은 1951, 이케아의 한 디자이너가 자신의 차에 탁자를 집어넣으려 고생하는 탁자의 다리를 떼어내는 것을 보면서였다. 영감을 얻은 캄프라드는 곧바로 소비자가 집에서 조립할 수 있는 형태의 가구 제품을 만들어 플랫 팩에 담기 시작했다. 플랫 팩 시스템은 저장 공간의 절약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캄프라드는 매장을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도시 외곽에 세웠다. 유통비와 인건비가 낮아지면서 이케아는 경쟁사들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가 가능했고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사진 : 이케아(IKEA)>


하지만 이런 이케아의 방식은 경쟁사의 반발을 일으킨다. 기존의 스웨덴 가구 업자들은 이케아의 낮은 가격이 시장 질서를 흐린다며 제조자 측을 압박했고, 집단적인 거래 거부 운동을 벌였다. 위기에 빠진 캄프라드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곳은 폴란드. 나무가 많아 목재업이 활성화되어있고 노동력도 저렴한 폴란드는 캄프라드가 찾던 나라였다. 당시 폴란드는 냉전의 기류가 흐르는 동유럽 국가였으나 그는 과감히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캄프라드는 이케아의 세계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특히 전통적인 가구 문화에 자부심이 있던 독일 시장에 진출하며 젊은 세대를 공략, 경제적인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이후 캄프라드는 이케아 본사를 네덜란드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글로벌 시장 확장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본사를 네덜란드로 옮긴 또 하나의 이유는 세금 때문이었다. 캄프라드는 제품 원가 절감은 물론 절세에도 관심이 컸다. 스웨덴이 강력한 소득세 정책을 펴자 그는 1976년 자신의 거주지도 스위스로 옮긴다. 캄프라드는 굉장한 구두쇠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흔이 넘은 현재도 여전히 경로우대증으로 할인을 받아 버스를 이용하며, 비행기도 이코노미 석을 고집한다. 이런 그의 짠돌이정신은 회사에도 적용되어, 이케아의 직원들은 사무실에서 반드시 이면지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일정 거리 이하 출장 시 비행기 이용 금지, 비행기 이용 시에는 이코노미 석 이용 등의 규칙을 지켜야한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주변의 비판에 그는 절약은 내 삶의 원칙이다. 나는 돈에 관해선 빈틈을 보이는 것이 싫다. 기업가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사진 : 이케아(IKEA)>


캄프라드는 사업 성공의 이면에 여러 구설수가 뒤따르기도 했다. 특히 젊은 시설 친나치 활동을 한 사실이 드러나 곤혹을 치렀다. 스스로 젊은 시절 저지른 큰 실수였다고 사과한 그는 회사 내 유태인 직원들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또한 이케아의 저가 전략을 유지하기 위해 제3세계 어린이들을 착취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아동 노동 문제는 물론 미디어를 통해 환경오염 문제까지 불거지자 캄프라드는 아이들의 의무적 교육을 보장하는 등 공급 업체와 개선된 계약을 맺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어두운 면모도 존재했지만 이케아의 성공에 있어 캄프라드의 철학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이케아가 고객들에게 즐겁고 신뢰 받는 존재이길 바랐다. 그는 가구 매장을 찾는 이들이 소풍하듯이 쇼핑하길 바라며 매장에서 음식을 팔기도 했다. 특히 그는 고객의 신뢰를 중요시 해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원가가 급격히 높아졌을 때에도 제품 카탈로그에 적힌 가격을 1년 간 지켰다. 현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이케아의 고문으로 활동 중인 그는 자신의 열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언가를 끝낸다는 것은 수면제를 복용하는 것과 같다. 은퇴는 사람을 시들게 한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다. 목표를 성취했다고 자부하는 조직은 그때부터 생명력을 잃는다.”


<사진 : 이케아(IK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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