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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UP STORY

레이 크록(Raymond A. Kroc)_<맥도날드(McDonald's)>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혁명적 비즈니스 모델로 이룩한 햄버거 제국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필요할 때가 되면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 당신이 무언가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 부어야 한다.” 쉰을 넘긴 이 세일즈맨은 햄버거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으나 자기 앞에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그는 한 햄버거 가게의 상표와 조리법, 캐치프레이즈, 황금아치 모양의 심벌까지 몽땅 사들였다. 당시 그의 변호사는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다며 만류했으나 그는 작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바로 20세기 미국인의 생활 방식에 가장 위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는 <맥도날드>의 레이 크록(Ray Kroc)이다.

 

  레이 크록은 1902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의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상을 좋아해 대니 드리머(Danny Dreamer)’라 불린 그는 머릿속으로 갖가지 상황을 설정하고 그에 어떻게 대처할지 상상하기를 즐겼다. 그의 공상은 에너지 낭비가 아니었는데, 그것이 곧잘 행동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레모네이드 가판대를 차리는 상상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당량의 레모네이드를 팔아 이윤을 남기는 사업재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기회만 생기면 새로운 일을 했다. 고교 중퇴 후 세일즈맨, 피아노 연주자 등으로 활동했으며 어리다는 이유로 군 입대를 거절당하자 나이를 속여 적십자 구급차 운전병으로 입대하기도 했다. 이후 레스토랑에서 사용하는 믹서기의 세일즈맨이 된 레이 크록은 작은 햄버거 가게에서 믹서기 8대를 구입했다는 얘기에 호기심이 발동,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는 매장을 방문한다.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맥도날드 형제는 낮은 가격, 높은 품질의 메뉴를 위한 셀프서비스 햄버거 매장을 운영 중이었다. 형제는 메뉴를 최소화 해 햄버거 중심의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Speedee Service System)을 구축했으며 조립생산라인 방식에 기초해 조리 절차를 간소화했다. 오늘날 맥도날드의 매장 운영 원리 대부분을 이미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방식이 성공을 거두자 맥도날드 형제는 캘리포니아주와 애리조나주에 몇 곳의 가맹점을 두고 있었다.

 

  레이 크록은 이것이 대박 사업이 될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는 맥도날드 형제에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다. 그의 나이 53, 크록은 디플레인스(Des Plaines)에 자신의 맥도날드 가게를 열었는데 이는 맥도널드의 9번째 가맹점이자 현대적 의미의 첫 맥도날드 매장이었다. 당시 미국은 프랜차이즈 사업이 시작된 지 이미 30여년이나 지난 시점이었기에 크록은 그야말로 업계의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그는 기존 프랜차이즈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프랜차이즈 비즈니스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된다.

 

  당시 프랜차이즈 기업들은 처음부터 고액의 가맹비를 책정해 이를 주요 수입원으로 삼았다. 때문에 돈을 받고 난 후의 가맹점 관리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크록은 최소한의 가맹비를 책정해 진입 장벽을 낮추었다. 그 대신 가맹점으로부터 매출액의 1.9%를 받는 방식이었는데 이 가운데 0.5%는 맥도널드 형제의 몫이었으므로 크록에게 떨어지는 건 1.4%였다. 이는 가맹점이 성공해야만 본사도 돈을 버는, 운명공동체적 구조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단기 이익을 놓고 보자면 직영점을 두는 게 훨씬 이득이었지만 크록은 직영점의 비율이 높아지는 걸 경계했다. 거대 조직에 소속된 직영점에선 성공에 대한 절박함과 지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혁신이 나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빅맥(Big Mac), 에그 맥머핀(Egg McMuffin) 등 큰 성공을 거두었던 맥도날드의 아이디어들은 대부분 가맹점들로부터 나왔다.

 

  크록은 표준화에 집중했다. 각종 실험을 거쳐 하나하나 체크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만들었는데 이 매뉴얼에는 쇠고기의 크기와 무게, 조리법, 감자를 써는 요령과 두께까지도 꼼꼼히 기록돼 있다. 표준화된 청결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수십 가지에 달하는 화장실 청결도 매뉴얼을 만들 정도였다. 세계 어느 맥도날드 매장을 가더라도 소비자에게 동일한 만족을 제공하고자 한 크록의 표준화 전략은 빅맥 지수로 대변되는 맥도날드의 글로벌 기업화에 크게 기여했다.

 

<사진출처 : 맥도날드 홈페이지>



  크록은 특히 ‘QSC V’, 즉 품질(Quality), 서비스(Service), 청결(Cleanliness), 가치(Value)를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품질의 관리 및 통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미군의 모든 기지에 맥도널드 매장을 개설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한 일도 있었다. “완벽함은 이루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맥도날드에서 원했던 것은 바로 그 완벽함이었다. 당시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혁신적 프랜차이즈 모델을 보여준 맥도날드의 가맹점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변화를 시도할 때마다 맥도널드 형제의 허락을 일일이 받아야 하는 계약 조건이 성장에 걸림돌이라 판단한 크록은 1961, 270만 달러의 빚을 내 맥도널드 형제의 모든 사업을 인수한다. 이후 자신의 사업계획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 그는 매장의 확대에 박차를 가한다. 1966년 마침내 주식 시장에 상장한 맥도날드는 연일 주가 폭등을 거듭하며 성공가도를 이어간다. 기존의 드라이브 스루 형식이 아닌 테이블을 갖춘 매장이 생긴 것도 같은 해의 일이다.

 

  그는 백만장자가 된 후에도 매일같이 이른 시간에 출근해 영업 준비를 도왔다. 화장실 청소도 마다지 않았다.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도 거의 날마다 사무실로 출근해 새 가맹점의 영업 첫 날 판매 보고서를 철저히 검토했으며, 경영진이 어떻게 회사를 이끌어 가는지를 눈여겨봤다.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레이 크록의 인생은 오로지 맥도날드였다. 그는 사업에 대한 스스로의 열정과 집중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하나님, 가족, 맥도날드를 믿는다. 하지만 회사에 있을 때는 이 순서가 정반대로 바뀐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도중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승리하길 바란다면 경주에 집중해야 한다. 내게는 맥도날드가 바로 그런 경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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