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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T-UP STORY

할랜드 샌더스(Harland D. Sanders)_<케이에프씨(KFC)>

커넬 할랜드 샌더스 <사진 : 케이에프씨(KFC)>



1,000번의 도전, 포기를 몰랐던 백전노장


  바쁜 일상에 현대인의 식사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패스트푸드가 식문화의 한 자리를 차지한 요즘이다.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의 시초가 된 브랜드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 그러나 패스트푸드’ KFC의 창업주 커넬 할랜드 샌더스(Colonel Harland D. Sanders)의 창업은 빠르지 않았다. 샌더스가 KFC를 창업한 것은 그의 나이 예순 여섯에 이르러서였다.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으며 사업수완도 별 볼일 없던 그가 세계 120여 개 나라에 19,000여 개 매장을 열고 연간 230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만든 원동력은 어린 시절의 작은 경험에서 비롯됐다. 1890년 미국 시골 마을에서 3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샌더스는 생계를 책임진 홀어머니 아래서 집안일을 도맡았다. 어느 날 동생들이 배고픔에 칭얼대자 샌더스는 평소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본 기억을 더듬어 호밀빵을 만들어준다. 그의 첫 호밀빵은 맛도 모양도 훌륭했다. 곧장 빵 하나를 더 만들어 어머니의 공장으로 달려간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겪는다. 호밀빵을 맛본 어머니와 공장 어른들이 그의 실력을 극찬한 것이다. 소년 샌더스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고, 이 즐거움은 그가 추구하는 평생의 가치가 된다.

 

  성인이 된 샌더스는 서른에 가깝도록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그는 일리노이 센트럴 철도회사에서 근무하며 통신강좌로 변호사 공부를 했고, 선박 회사를 공동 경영하기도 했다. 두 사업은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이때 공부한 법률 지식과 사업 경험은 훗날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고생이야 한 번 하고 나면 지나가는 거지만 배운 건 영영 써먹을 수 있다. 당신이 이제까지 걸어온 길이 어떤 것이든 결코 하찮지 않다.” 샌더스의 말이다.

 

  선박 운영 사업의 실패 후 그는 전 재산을 털어 램프 제조업에 도전한다. 그러나 곧 전기램프가 상용화되면서 파산을 맞는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시대적 흐름을 보지 못한 것을 크게 반성한다. 이후 타이어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평소 샌더스의 성실성을 눈여겨 본 스탠드 석유대리점 지배인이 주유소 사업을 제안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생산하면서 자동차 붐이 일던 때였다. 램프 사업의 실패를 떠올린 샌더스는 주저 없이 주유소 사업에 뛰어든다.

 

  그는 최고의 서비스를 추구하는 자가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철학을 가지고 다른 주유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며 높은 매출을 올린다. 그러나 미국 전역에 불어 닥친 경제대공황을 피할 수 없었다. 또 한 번의 실패였다. 그러나 샌더스만의 독특한 서비스 방식이 당시 셸오일 책임자의 귀에 들어가면서 샌더스는 새로 개업하는 주유소 대리점의 사장자리를 제안 받는다.

 

 


켄터키주에 위치한 샌더스 박물관

 

 


  샌더스는 주유소를 새로 개업하며 5평 남짓한 건물 귀퉁이에 작은 식당을 차린다. 주변의 형편없는 식당에 신물이 난 운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샌더스의 주유소는 성황을 이룬다. 그는 마을의 유명인사가 되어갔다. 당시 켄터키 주에서는 지역에 공헌한 일이 많은 인물에게 커넬이라는 명예호칭을 수여했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커넬 샌더스라는 이름의 유래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또 다시 비극이 생겼다. 가게에 불이 나 10년 간 쌓아온 샌더스의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 절망 앞에서 그는 다시 음식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 어떤 일보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훗날 샌더스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평생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일, 남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내 역할에 충실했다고 밝혔다.

 

  새롭게 레스토랑을 개업한 그는 어머니가 알려주신 레시피에 자신만의 비법을 더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의 맛을 완성해낸다. 문제는 30분이 넘는 조리시간이었다. 시간 때문에 맛을 포기할 수 없었던 샌더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압력솥이었다. 당시 압력솥으로 튀김요리를 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숱한 도전 끝에 샌더스는 압력솥을 이용한 닭튀김을 만들었고 지금도 전 세계 KFC 매장에서는 압력을 이용한 조리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곧 식당이 있는 지역에 국도 건설 계획이 발표되면서 그는 퇴거명령을 받는다. 경매로 내놓은 가게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낙찰됐다. 사업 기반을 잃은 그에게 남은 것은 치킨 레시피 뿐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압력솥과 소스를 싣고 무작정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레시피를 알려주고 로열티를 받는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했다. 현대적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사업의 시초였다. 1년간 1,008곳을 돌아다닌 그가 따낸 계약은 단 7건이었다.





  고전하던 샌더스는 피터 허먼을 만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허먼은 샌더스의 치킨을 맛본 후 자신의 가게 이름을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으로 바꿨고, 그의 가게는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한다. KFC는 이후 샌더스의 딸이 내 놓은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크게 도약한다. 바로 테이크아웃 판매였다. 매출은 수배로 뛰었고 손님이 들고 가는 치킨은 그 자체로 홍보물이 되어 주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의 매장을 돌아다녔다. 맛과 청결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세상과 역사에는 일하다 쓰러진 인간보다 녹슬어 바스러진 인간이 훨씬 많다. 숨이 붙어있는 한 절대로 은퇴라는 말을 쓰지 마라.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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